밀레니엄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스웨덴) - 츤데레 해커와 누나전문기자의 모험 by wineapple



유럽 영화를 헐리웃에서 리메이크했다고 하면 보통은 원작 영화부터 먼저 찾아보는 편이다. 열에 여덟 정도의 비율로 원작이 더 낫다고 판단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인데, 이번 헐리웃판 [밀레니엄]이 아무리 그 유명한 데이빗 핀처의 작품이라 해도 일단 원작부터 먼저 챙겨주는 것이 마음에 안정(?)이 된다고나 할까.

북유럽 영화들을 보다보면 어떤 공통적인 분위기가 있는데, 묘하게 스산하고 무거우며 동시에 축축하면서도 건조한 느낌이 있다. 이건 영화의 풍경 뿐만 아니라 배우들 또한 마찬가지다. 화려한 외모보다는 북유럽 특유의 투박하면서도 보면 볼 수록 묘하게 매력적인 배우들이 등장하는데 대체적으로 이들의 공통점은 처음엔 "음... 별로 안 예뻐"였다가 후반에 가서는 "음, 멋있는데?"로 끝나는 마력이 있다고나 할까. 아마 이 영화 속 주인공 '리스베트' 역의 누미 라파스가 그 전형적인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밀레니엄] 스웨덴판은 어찌보면 연출이나 스타일, 배우들의 면면 모두가 북유럽 영화의 성격을 그대로 담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무리 헐리웃 스타일을 차용하려고 해도 결국은 그 나라의 문화나 정서가 녹아들 수 밖에 없는데 이 [밀레니엄]이 그러한 경우다. 데이빗 핀처의 헐리웃판이라면 보나마나 굉장한 스타일과 속도감, 치밀한 전개로 혼을 쏙 빼놓을 게 예상되지만 이 [밀레니엄] 스웨덴판은 2시간 30분이 넘는 제법 긴 러닝타임 동안 그리 큰 속도를 내지 않는다. 오히려 우직하다 싶을 정도로 캐릭터 각자의 이야기, 재벌가의 숨겨진 이면, 그리고 사라진 재벌가 손녀의 행방까지 하나씩 하나씩 껍질 까듯이 천천히 보여주는데 공을 들인다. 때문에 초반 30분 정도는 약간 지루할 법도 하고 후반 20분 정도는 "저렇게까지 다 설명 안해줘도 되는데..." 싶을 정도로 숨겨놨던 이야기까지 다 풀어준다. 거기다 악인이 당하는 순간의 쾌감은 약한 편이고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의 쾌감도 조금 약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이 정직하다못해 우직하기까지 한 스웨덴판 [밀레니엄]이 상당히 맘에 들었다. 일단 연쇄살인이라는 자극적인 테마를 다루면서도 그 사건 자체에만 국한되어 이야기를 몰아가는 것이 아니라 연쇄살인의 피해자들, 사라진 손녀딸, 주인공 리스베트까지 영화 속에 등장하는 '여자'들을 하나의 거대한 대상으로 놓고 주위 남자들이 어떻게 이들을 '증오'하고 괴롭혔는지를 이야기하는데 상당히 많은 공을 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사건 외에도 각 여자들이 처한 입장을 풀어가는데 결코 소홀할 수가 없다. 감독은 호흡이 느려지는 걸 감수하면서까지 여자들이 당한 증오의 사건들을 이야기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고, 이것이 난 마음에 들었다.

이 영화에서는 두 명의 여자가 계속 사건의 중심에 놓여 있다. 한 명은 천재 해커 리스베트, 또 한 명은 40년 전 실종된 재벌가 손녀 하리에트다. 두 여자의 운명이란 결국 사건의 전말만 놓고 보면 상당히 비슷한데, 리스베트가 직접 맞서 싸우는 쪽을 택했다면 하리에트는 그와 정 반대의 선택을 했다. 리스베트가 겪은 고통과 치욕에 비해 하리에트의 삶은 짤막한 회상으로 다뤄지는 수준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리스베트의 선택과 투쟁 쪽에 더 마음이 기울 수 밖에 없다. 특히 하리에트의 실종 이후 여전히 되풀이 된 비극들을 생각하면 더욱.

[밀레니엄] 스웨덴판에서 가장 맘에 들었던 것은 리스베트 캐릭터였다. 그녀는 말 그대로 모든 사건을 주도하는 인물이다. 여기서 '주도한다' 함은, 사건을 일으키는 민폐 캐릭터란 말이 아니라 진짜 '자기가 다 해결한다'는 뜻이다. 리스베트는 자기에게 악랄한 짓을 한 놈을 가장 합당한 방식으로 응징해주고 - 물론 나 같았으면 그걸 '잘라' 버렸겠지만... - 거기다 자기가 뒷조사했던 누나 전문 기자 미카엘이 뭔가 재미난 일을 하고 있는 듯 보이자 먼저 힌트를 던져주며 직접 사건에 뛰어든다. 뛰어난 기억력과 추리력으로 미카엘이 더듬거리며 쫓아가던 사건의 줄기를 금세 뿌리채 캐어내기도 하고, 미카엘이 맘에 들자 단숨에 내 남자로 만들어버리기도 하며 (조타!) 나중에 위기 상황에 몰려 미카엘이 죽네 사네 하고 있을 때 온 몸을 날려 나쁜 놈과 싸우는 것도 리스베트, 그녀였다. 그 뿐이랴? 도망가는 범인 차를 쫓아가 골프채로 유리를 박살낸 것도 모잘라 오토바이 타고 끝까지 추적... 마지막 최후의 순간에도 리스베트는 자비 따윈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오오... 너란 녀자 멋진 녀자.

사실 그동안 헐리웃이 진보의 아이콘 행세를 하며 '여성 영웅' 캐릭터를 수도 없이 만들어냈지만 결국 그녀들이 가진 성적인 섹시함을 강조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남자에게 흔들리는 약한 모습 따위로 이들의 영웅담을 끝끝내 시궁창에 빠뜨리곤 했다. 하지만 이 [밀레니엄]에 등장하는 리스베트는 그런 모든 헐리웃스러움과는 완전한 대척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인물이다. 일단 고스족 코스프레의 터프한 비쥬얼도 그렇지만 리스베트가 남성과 여성 모두와 동침을 하는 양성애자라는 점, 여성적인 매력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을 초월한 매력이 있다는 점, 거기다 구원의 캐릭터이면서도 동시에 파괴의 캐릭터를 선보이기도 한다는 점이 그 것이다. 헐리웃판의 배우에 비해 스웨덴판의 배우 누미 라파스는 훨씬 강하고 중성적인 매력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소위 말하는 '드세다'는 느낌을 주지도 않는다. (아, 이 표현 정말 싫지만 다른 마땅한 게 잘 안떠오르네...) 그녀는 여성과 남성, 그 어떤 성적 역할에도 구애받지 않는다. 그냥 자기 살 길을 찾아 그렇게 가는 것 뿐이다. 거기다 주로 남자들이 맡았던 '힘과 두뇌로 사건을 해결하고 위기 때 다른 이를 구해주는' 역할을 리스베트가 거의 온전히 다 맡고 있다보니 막판 클라이맥스의 육탄전에 이르면 가히 웃음이 날 지경이다. 너무 통쾌해서 말이다.

이렇게 리스베트가 무진장 능력자에다 결단력 쩌는 주인공이다보니 상대적으로 중년의 고발 기자 미카엘은 조금 얌전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왠지 "부끄럽구요~"를 연발할 것 같은 '정통 시사주간지 밀레니엄'의 고발기자 미카엘은 어린 시절 자기와 놀아주기도 했던 추억 속 누나 하리에트를 찾기 위해 사건에 뛰어든다. 그리고 그는 40년 간 삽질했던 사람들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완전히 다른 시각에서 사건을 풀어가며 탐사 전문 기자의 능력을 발휘하지만, 실상은 리스베트가 뛰어들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해결의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한다. 이렇다보니 이 영화는 투 톱이라기보다는 '천재 해커 원 톱'에 비중 있는 몸빵(?) 한 명 추가의 이미지도 좀 있긴 하다. 하지만 뭐, 미카엘이 이렇게 제대로 보조를 해주지 않았다면 사회성이 결여된 리스베트가 그렇게 여기저기 뛰어다닐 일도 없었을테니 이건 좋은 콤비 플레이 맞습니다, 맞구요~

미카엘은 사건 초기부터 리스베트에게 간택되어진(?) 몸이기 때문에 츤데레 리스베트의 '츤츤 데레데레' 공격에 마구 휩쓸린다. (아마 이것이 대부분의 웃음 포인트) 리스베트의 캐릭터가 더욱 매력적인 것은 자기 이야기 하나도 안하고 감정 표현도 투박하지만 "나 너 좋으니까 도와준다. 받아라, 내 마음"의 순간들을 즐비하게 내어놓기 때문이다. (가히 츤데레의 완성형이로다) 리스베트가 그렇게 갑툭튀하며 "받아라 내 마음" 공격을 시전할 때 당황하고 또 좋아하고 또 그렇게 헷갈리는 미카엘의 모습들이 깨알같아서 은근 "이건 스릴러물을 가장한 조련물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영화 속에서 '조련물 최고의 순간'을 몇 가지 꼽자면, 갑자기 미카엘 위에 올라탄 리스베트가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 바람같이 방을 나갔을 때... 아님 "볼 일 다 끝났는데 너 왜 안 가니?" 이러면서 뚱하게 물어볼 때..? 순간 멍한 반응을 보이는 미카엘, 아... 그렇게 그는 조련당했습니다.

또한 리스베트가 전형적인 여성 캐릭터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점은 마지막 위기의 순간에 가장 크게 드러난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미카엘의 목숨을 살려주고, 범인과 싸우고, 쫓아가고, 박살내는 건 모두 리스베트의 몫이다. 너무 노골적인 장치인 것 같기도 하지만, 줄에 묶여서 살려달라 허덕대는 미카엘을 멋지게 뛰어들어 구원해주고 보통의 여성 캐릭터라면 당근 보여줄 법한 자비 따위 개나 줘버리며 말 그대로 상대를 '개박살' 내는 리스베트의 화끈함은 [밀레니엄]의 제목에도 등장하는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에 대한 그녀의 명쾌한 답변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이 영화에서 미카엘과 회장님을 제외한 대다수의 남자들은 여자를 '증오'한다기보다는 여자를 '하찮게' 보는 인물들이라 하는 게 더 맞다. 그들이 벌이는 범죄의 방식은 매우 변태적이며 동시에 매우 강압적이다. 영화 대사에도 나오지만 살인은 그냥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순서일 뿐, 그들이 벌이는 일의 가장 궁극적인 목적은 여성을 성적으로 제압하고 폭력을 가하는 것에 있다. 즉, 여성은 그들에게 있어 감정을 교류하는 '인간 대 인간'의 대상이 아니라 착취와 변태적 놀이의 희생양일 뿐이다. 극에서 등장하는 여성들은 자신이 어떻게 이런 남자들의 폭압에 희생 당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인물들이다. 그리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를 해결하려 애쓴다. 하지만 대부분은 실패했고 리스베트만 겨우 나름의 성공적인 탈출구를 찾는다.

이 영화가 그나마 평등하고 진보적이라고 하는 북유럽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벌어지는 일은 전 세계 그 어느 곳과도 그리 다르지 않다. 유감스럽게도,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자에 대한 태도는 그리 달라진 것이 없음을 영화는 내내 말하고 있다. 사회가 진보되었건 그렇지 않았건 여자를 증오하는 남자들은 늘 존재했다. 여자가 변했기 때문에 새삼 증오받는 것이 아니다. 이런 남자들의 폭력은 100년 전에도 1000년 전에도 똑같이 존재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건 어디까지나 힘의 논리다. 증오가 아니라 '하찮게' 보기 때문이며 그 하찮게 보는 심리의 근원에는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나약한 존재'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리스베트가 매력적인 이유는 그런 남자들의 근원적 인식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캐릭터이기 때문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스베트 같은 이가 거의 없는 현실을 생각할 때 어딘가 모르게 영화 속 '승리의 환타지'가 씁쓸한 뒷맛을 남기기도 한다.
  
[밀레니엄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은 제목만 보자면 상당히 자극적일 것 같고 실제로도 제법 그렇지만, 적어도 스웨덴판에선 이전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캐릭터와 정직한 구성을 엿볼 수 있으므로 새롭고 신선한 작품을 찾는다면 오히려 추천할 만 하다. 특히 스릴러로서의 기본 줄기에 매우 충실한 전개를 선보이기 때문에 느린 호흠에도 불구하고 전혀 지루함 없이 끝까지 몰입할 수 있다. 더불어, 들리는 말에 의하면 이 영화의 3시간짜리 확장판이 있다고 하는데 이건 아무래도 지금 버전보다 더 깊이 들어갈 것 같으니 한 번 보고 싶기도 하다. 물론 시간 나면 헐리웃판도 꼭 봐야겠지. 얼마나 헐리웃스럽게, 또는 헐리웃스럽지 않게 각색되었는지 정말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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